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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Stage#25 O Cebreiro - Samos

Stage#25 O Cebreiro - Samos

Stage#25 O Cebreiro - Samos 10.3


새벽에 길을 나선다.

칠흑같은 어둠의 산속이라 시계 제로. 비와 안개때문에 하산하는 일이 더디다.

다행히 Leon의 중국가게에서 산 후래쉬용 배터리가 하룻만에 닳아버려서 고생했는데 어제 기념품가게에서 배터리 구해두어 밤길을 나설 수 있었다.


▼비가 내린다.

비와 안개, 구름 속에서 숙취를 씻어낸다.

구름 사이로 달빛이 새어나오는 가 싶더니 이내 사리지고 빗발이 굵어졌다.

판초를 처음 꺼내 입는다. 배가 고프다.

Alto de Poio에 이르러 어둠속에서 Pelegrino 동상을 찍어보지만 그림이 될리 없다.



▼전형적인 갈리시아의 날씨다. 비, 안개, 소나기, 천둥. 목장, 소떼, 양떼, 닭과 개

하루종일 하산하는 것 같다. 경사가 심한 곳에선 허벅지 근육통때문에 힘들다. 무릎과 발가락도 고전이다. 끈을 고쳐맨다. 내리막에선 끈을 꽉 매라는 안상호형의 조언이 생각난다. 


▼길은 온통 소똥밭이다. 지뢰 피하는 것도 지쳐서 그냥 걷는다. 소떼를 만나다. 촌로부부 두명이 소떼를 몰고 가는데 소몰이 강아지의 활약이 대단하다. 낙오하는 소를 쥐잡듯 한다.


▼Padornelo의 좁은 오르막을 할딱거리며 오르자 바르 Puerto do Poio가 나타난다. 축축하게 젖은 상태에서 뭘 좀 먹어야겠기에 배낭을 내려놓고 안으로 들어가자  여수댁부부가 반갑게 맞이한다. 커피와 빵을 대접 받는다. 그들이 먼저 떠나고 좀 쉬었다가 나오는 길에 방명록이 있길래 힐끗 들춰봤다. 세상에! 정말 우연히 목동부부의 응원메시지를 본다. 감동이다. 9월30일 지나가셨으면 삼일거리, 따라 잡기는 거의 불가능하지만 마음이 찡하게 전해져 온다.


▼Triacastela에서 점심. 또 송어를 시켰다. 한국에선 귀한 놈, 실컷 먹자. 하우스와인은 그냥 따라 나온다. 갈리시아방식의 스프는 영판 우리네 시래기국이다.



카페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이오상이 지나간다. 조그마한 여자애가 씩씩하게 잘 걷는다. 

일단 기나긴 내리막이 끝나서 긴장이 풀어지고 졸립지만 조금 더 가기로 한다. 

다음 목적지가 어딘지도 모른채 억지로 배낭을 짊어진다. 


Samos에 가는 길에 차도를 탔다.

사람들이 없어서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맘껏 들을 수 있었다.

처음엔 무겁던 발걸음이 조금씩 가벼워졌다. 텅빈 거리에 혼자 걷는 자유, 편안함.

뭔가 큰 짐을 아주 편하게 내려놓은 느낌.

뭔가가 뭘까? 무망, 탐욕, 오만, 미련, 기대, 편견...

그런 것을 내려 놓으면 길이 좀 쉬워질까. 인생이 좀 편해질까.


▼그렇게 언덕을 오르고 내리고 마을을 돌아가다가 이름없는 산마루 언덕위에서 아래의 광경을 보고 한참을 서있었다. 

앞에 있는 수도원 건물을 중심으로 Samos는 한장의 그림엽서다.

아무 생각없이 걷다가 갑자기 만난 풍경이 한 것도 없이 상 받는 기분이라 죄송하고 감사했다.


▼Samos를 향해 언덕을 내려가다가 청소하는 할머니를 만났다. 왜 할머니들은 똑 같이 생겼을까?


▼중세 고딕 바로크 르네상스가 섞여 있는 수도원을 둘러보다 뜻밖에도 YS와 이오상을 또 만난다. 세번 헤어지고 네번 만나다. 인연이 너무 반복되다 보니 아침드라마 같아서 좀 식상하다. 그래도 만났으니 셋이서 같이 밥먹고 헤어졌다.  

같은 알베에 찾아 온 JS가 횡설수설 O Cebreiro 사건을 말한다. 아직 술이 덜깬게 분명하다. 이 친구는 순례 마치고 곧 입대한다고 한다. JK는 군대 마치고 까미노에 왔으니 서로 반대방향인 셈이다.  




지환이가 몸무게를 8kg이나 줄였다고 한다. 녀석은 집에서 까미노를 하나 보다.

가족이 사무치게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