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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Stage#22 Rabanal - Ponferrada

Stage#22 Rabanal - Ponferrada

Stage#22 Rabanal - Ponferrada


더 긴 하루.

오늘은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출발.

새벽출발때의 탄력은 매우 좋았다. 몸이 가벼워졌다.

아침 달빛을 마시며 철십자상까지 달리듯 한달음에 오르다보니 같이 출발했던 HJ가 보이지 않는다.

어제 그레고리안 성가로 진행하는 저녁 미사를 놓친것이 아쉽지만 대신 Fado와 Vino의 즐거운 산악축제가 있었다. 

비탈을 오르며 혹시 철십자가의 일출을 맞이할 수 있을까 기대가 되었다. 


▼폰세바돈의 일출에 감사한다. 이라고산의 입구를 차지하고 있는 이 쇠락한 마을은 몇채의 집만 간신히 남아있다. 여기를 떠나면 산을 넘기까지 가게도 물도 없을 것이다. 굶는 일이야 다반사라지만 물은 반드시 준비해야 한다.


▼누군가 뒤에 오는 사람을 위해 정성스런 하트를 만들어 두었다. "Gift of Tears" 무슨 사연인지 알 수 없으나 그녀가 남긴 쪽지가 아침이슬을 머금고 있다.


▼마침내 철십자가(Cruz de Ferro)에 이른다. 순례자들이 가져온 소원의 돌멩이를 던져두는 곳이다. 나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다. 안내문에는 쓰레기때문에 아무것도 가져오지 말란다. 그래도 사람들은 저마다의 소원과 액운을 운반하여 날아온 돌멩이들이 어언 돌무덤을 이룬다. 소박한 철십자가 있는 이곳은 해발 1,505m, 프랑스길 전구간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이곳은 나름 순례길의 성소처럼 되어서 작은 예배당도 하나 지어두었는데 늘 문이 잠겨있다고 한다. 


▼Luca, Adam, Johny가 포즈를 취해 주었다. Luca는 늘 권련을 말아 피며 내게도 권한다. 산티아고 도착하면 한모금 하겠다고 했다. 



▼Sara에게 사진을 부탁했더니 역광때문에 애를 먹었다. 장소를 옮겨 Johny가 나의 가족사진을 찍어 주었다.


▼산을 넘고 넘어 멀리 Ponferrada가 보인다 싶을 때부터가 힘들어졌다.

기나긴 downhill. 발바닥, 발목, 무릎, 골반, 척추, 요추 등 모든 뼈들이 일제히 비명하는 급경사 산길이 길게길게 이어진다. 경사도 경사려니와 돌과 바위가 험상궂어서 때론 달려내려가는게 편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비가 안와서 다행.


▼한참 내려가는데 Wine Gang들이 나를 추월한다. 철인3종선수 독일여자 Sandra가 선두를 서고 Johny가 뒤를 따르는데 거의 산악구보다. Rupert는 맨뒤에서 허겁지겁 따라간다. 어제도 꽤 마셨나보다.


▼El Acebo는 산간마을인데 좁다랗고 긴 골목 옆으로 알베르게며 레스토랑들이 즐비하다.

아래쪽으로 좀 내려가서 왼편에 있는 한적한 Bar에 들러 맥주와 Tortilla로 점심. 또르띠야 두조각, 맥주가 4유로.

맥주를 들고 밖으로 나와서 신발과 양말을 말린다. 아직 물집 잽히지 않은게 천만 다행이다. 내리막에서는 특히 '발바닥말리기'가 중요하다.


▼Molinaseca의 Rome 다리를 건너다 보니 다리 아래쪽에 낯익은 얼굴들이 있다. 왼쪽편 강기슭에선 홈리스 같은 순례자들이 누워있고 오른쪽에는 비키니의 현지인이 일광욕 중이다. 홈리스와 비키니. 둘 다 가진것 없는 처지.


▼그냥 주저앉을까 잠시 고민하였다. 산을 완전히 다 내려왔고 알베르게들도 깨끗해 보인다. 헌데 뭔가 관광지 같다. 설악동같은 기분. 에잇! 뜨자. 환타 한병 마시고 계속 행진. 아스팔트를 걷느라 발바닥에 불이 붙는다.


▼사진 찍어도 되냐고 묻자(바디랭귀지) 능청스레 포즈를 취해준다. 저 신문 고깔은 옛날에 많이 해보던 짓이다.


▼대도시로 진입하는 경우에 길을 잘못 들기 쉽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도 미리 지도보고 공부 안한 바람에 지척에 알베르게를 두고 빙빙 돌아 고생. 폰페라다는 특히 우회로를 찾지 못하면 마을로 들어갔다가 입구에 있는 알베르게로 되돌아 오는 사태가 벌어진다. 가뜩이나 긴 코스에서 이런 덤까지 얻게되어 기진맥진. 


뜻밖에 Dan를 다시 만나다. 기적같은 일이다. 알베르게 부엌에 물 마시러 갔는데 Jaime가 있었다.

놀라고 반갑다. Burgos에서 아들 Gregory가 탈이 나서 지체하고 도중에 차를 이용했다고 한다. 

오랜 친구들 다시 만난 기쁨.

그는 내가 Daisy에게 맡긴 목각등산화 목걸이를 목에 걸고 있다. Los Arcos에서 주문해 두었다가 생일날 같이 있을지 몰라서 그의 며느리에게 맡겨 두었던거다. 그런데 오늘이 Dan의 생일. 

둘이서 템플기사단 성까지 천천히 걸었다. 

이성은 현재 유럽에 남은 템플기사단의 성 중에서 가장 보존상태가 좋은 곳이다. 파올로 코엘료의 소설 "순례자"에서는 이곳에 들어와 의식을 치루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성과도 흡사하다. 아십게도 일요일이라 들어가 보질 못했다. 다음번에 오면 반드시...

성을 한바퀴 빙 둘러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자신은 몸이 좋아져서 잘 걷는데 내가 아놀드 슈왈츠제네거 같다고 칭찬한 아들 그레고리는 배탈 설사에다가 기력쇠진으로 헤매고 있다며 흉을 본다. 데이지도 상태가 좋지 않다고 한다. Dan이 좀 쓸쓸해 보였다. 함께 산책하고 맥주 한잔. 저녁에 생일파티 하자고 했다.

돌아오는 길에 나만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Dan은 끝내 참는다. 살 빠졌다고 흐뭇해 한다.



▼HJ와 YS를 다시 만난다. 그녀는 이오상과 같이 길에서 딴 산딸기로 쨈을 만들고 있다. 여수댁은 빨래터에서 만났다. 물론 Wine Gang들도 보았는데 Rupert는 지쳤는지 더 이상 농담을 하지 않는다. 폰페라다에는 여기 수도원에 대형 알베르게 하나만 있어서 많은 사람들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Morgan네 식구들이 Dan의 생일파티를 당연히 준비해 줄줄 알았는데 모두 말이 없다. 힘든 탓일게다. Dan은 아예 방에 들어가 잔다고 한다. 밖으로 나갔는데 아! 일요일. Never on Sunday. 케익가게도 수퍼마켓도 모두 문을 닫았다. 심지어 택시도 운행을 하지 않는다. 일단 중앙광장 번화가에 가서 여기저기 뒤지다가 전시용 와인한병을 구하고 어린이 장난감가게에 가서 장식용 양초를 샀다. 마침 한국에서 온 여자들이 파티용으로 가져온 머리장식이 히트였다. 포기하고 잠든 Dan을 깨워내어 다같이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산티아고는 어둠 저편 멀지 않은 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까미노의 엔딩을 생각한다. 잠이 오지 않아 알베르게 마당에 앉았다. 잠못 이루는 영혼이 나 혼자만은 아니다. 10시 통금이 다가와서 부리나케 알베르게 바깥에 나와 한잔. 


단순한 일상의 반복일줄 알았던 까미노는 매일이 기적이고 감동이다. 사실(fact)만으로도 Camino는 대하드라마다. 한국드라마 또는 할리우드 영화공식을 적용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꼭 해피엔딩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얘기다. 

모든 아름다운 것은 슬프다. 그래서 윤동주가 노래했던가,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