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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Stage#21 Orbigo - Rabanal

Stage#21 Orbigo - Rabanal

Stage#21 Orbigo - Rabanal 9.29 


38km 꽤 긴 하루.

어김없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


▼명상, 자기계발 강사, 배낭여행을 즐겨하는 49세의 미혼녀 HJ가 새벽에 길을 나서며 1시간 동행을 부탁했다. 걷다보니 종일 같이 걸으며 얘기를 나눈다. 레온 이후 묵언수행이 이틀을 넘지 못한다. 인도여행, 히말라야트레팅 등등 흥미있는 얘기들을 나누었다. 


▼아무리 안전한 까미노라 하여도 깜깜한 새벽길을 혼자 나서기는 불안하다. 특히 여자들의 경우엔 알베르게에서 동행을 구해서 출발하는게 좋다. 간혹 '사고'가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또 어두운 탓에 길을 놓치는 경우도 있어서 새벽출발은 둘이상 무리를 만드는게 좋다. 새벽 Orbigo를 나와 Astorga까지 거의 한달음.


▼산토 토리비오 십자가(Cruceiro Santo Toribio)는 석조로 만들어졌다. 여기 기쁨의 산에서 보면 Astorga가 한눈에 들어온다. 멀리 레온 산맥은 내일 넘어야 할 해발 1,515m의 험로이다. 전체 루트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대성당의 쌍동이탑이 희미하게 들어온다. 다온것 같지만 한시간이 넘는 거리이다. 


▼한국인 순례자들이 많아졌다는 것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Astorga는 로마때부터 주요 도시였다고 한다. 대표적인 순례루트인 프랑스길과 은의 길, 로마길이 만나는 곳으로 중세부터 많은 순례관련 시설들이 있었고 지금도 상업 관광이 활발한 거점도시이다. 

Astorga 중앙광장에서 Cooke 모녀를 다시 만난다. 11시 기차로 Ireland에 돌아간다고 한다. 정겨운 모녀와 함께 사진.



▼중앙광장의 카페에서 브런치 먹고 이곳의 명물 쵸콜렛을 샀다. 그래 오랫동안 단거에 굶주렸다. 채식주의자 HJ는 쵸콜렛이은 우유가 원료이며 우유는 소의 젖이기 때문에 먹을 수 없다 한다. 세상에 화이트쵸콜렛을 거부하다니. 이곳에는 쵸콜렛 박물관도 있다. 


▼ 아름답고 신비한 신고딕양식의 Gaudi건물을 만나는 것은 즐거움이다. 이곳에는 Gaudi 건축물이 까미노박물관에 함께 카테드랄광장에 있다. 아무리 가는 길이 멀어도 이곳을 빼먹을 순 없다 생각하고 막 들어가려는데  HJ가 까미노 친구를 만나 반갑게 인사한다. 미국인 의사 Grant와 April 부부는 그녀가 까미노초반 몸이 아팠을때 도와준 사람들이라며 몹시 반가와 한다. 인사하고 사진 찍어주다보니 박물관은 들어가보지도 못하고 그냥 통과. 누군가와 동행한다는 것은 적어도 한쪽발은 묶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YS JK를 떠나보냈던거 아닌가. 내일은 다시 싱글이 되리라. 자유롭고 외로운 혼자만의 길에서 나를 만나리라. 내게 질문하리라. 



▼El Ganso는 다 쓰러져가는 폐허의 마을이다. 두어군데 알베르게가 있었는데 목이 말라 들르고 싶었지만 쓰러져 가는 건물이라 그냥 지나쳤다. 그러다가 이 웃기는 Bar를 만났다. 제목이 한심하게도 Cowboy다. 스페인에서 만나는 마카로니웨스턴은 과연 이름에 걸맞게 지독하게 맛없는 Tortilla와 맥주를 내놓는다. 


▼New Zealand에서 온 Evon은 늘 동행하던 일행 셋과 떨어져 혼자 걷는다. 작은키에 매우 씩씩하고 명랑한 아줌마인데 액센트가 워낙 강해서 영어 듣기가 쉽지 않다. 오늘 처음 본 Spanish girl Maiti는 Leon에서 출발했다 한다. 그래서 그런지 얼굴은 말짱한데 발가락이 엉망이다. Evon, HJ, 우리셋 모두가 그녀의 발가락 치료를 돕느라 부산을 떨었다. Evon은 그녀의 발가락 모양을 Naughty toe라고 하는데 걷기에 대단히 불리한 구조라고 한다. 



▼도중에 야생 멧돼지를 만났다. 아프리카 혹멧돼지랑 비슷하게 생긴 놈인데 당당하게 길을 가로질러 사라졌다. 식은 땀.

멧돼지보다 무서운건 사실 자동차이다. 특히 이 구간은 도로따라 걷는 길이 많은데 때로는 길을 가로질러 가기도 한다. 가끔 사고로 죽은 사람들의 십자가를 볼 수 있다. 지치면 집중력이 떨어져 자칫 사고날 수 있으니까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이럭저럭 Rabanal에 이른다. 38km. 오버페이스한 느낌. 적적한 오지 산간마을 Rabanal은 내일부터 오르게 될 가파른 이라고 산길의 입구에 자리하고 있다. 12세기 템플기사단들이 이 외진 산을 오르는 순례자들을 안전하게 보호해 주었다고 한다. 고풍의 돌담과 구멍가게 하나 없는 마을 가운데에 베네딕트 수도원이 지원하는 교회 산타마리아 성당도 그들이 지었을거라 추측한다. 성당에 들어서면 한글 안내문을 만난다. 저녁예배에 참석하고 싶었지만... 




▼Albergue del Pilar는 반드시 머물러야 할 곳에 속한다. 마당에 있는 바에서 순례자들이 쉽게 어울려 한잔 할 수 있는 분위기도 좋지만 안주인과 호스피탈레로의 친절로 유명한 곳이다. 맥주 두캔과 salada로 저녁. Leon에서 같은 방을 썼던 Swedish 미국인 아줌마(from Virginia)를 다시 만난다. 그날밤 소란을 사과하자 웃는다.


▼작은 콘서트가 있었다.

포르투갈인 Alexander와 그의 스페인 부인이 포르투갈 전통악기(Guitarra Portuguesa)로 Fado를 연주해 주었다. 내년 1월 딸을 출산하게 되는 부인을 위해 와인 한병을 샀더니 코리안 아미고를 위한 답례로 'La Bamba'와 '관타나메라'를 불러주었다. 근데 이때부터 애들이 일어나 춤을 추고 모두들 축제분위기.




내일 아침은 영하로 떨어질거라 한다. 순례자들이 기상정보를 전하며 긴장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가장 높은 산을 오르는데다 날씨까지 나빠지면 쉽지않은 하루가 될 것이다. 그렇다 한들, 하루하루가 놀라움과 새로움, 감사와 축복으로 가득찬 이길에서 두려워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