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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Stage#16 Carrion - Terradillos

Stage#16 Carrion - Terradillos

Stage#16 Carrion - Terradillos 9.23


Boadilla에서는 저녁에 이어 새벽 출발전에도 아내와 facetime을 할 수 있었다.

냉면사발 반만한 컵으로 커피를 마시고(Cafe con Leche) 어둠을 나선다.

마을을 빠져 나갈때 늘 머뭇거리게 된다. 앞사람들의 행적을 쫓을 때야 무슨 표식도 지도도 gps도 무용하지만, 새벽의 어둠속에서 홀로 되었을 때에는 '노란 화살표'가 전부이다.

목동팀한테 들은 얘기로는 오늘 첫코스 17km 가는 동안 마을도 가게도 물도 없다고 한다.
가혹한 여정은 아름다운 새벽노을로 시작된다. 새벽에 노을이 지면 날씨가 나쁘다던데...



▼척박한 가로수길은 커브하나없이 올곧게 잘난척 죽죽 뻗어서 지겨움을 더한데다 카페도 없어서 예상대로 굶어야 했는데 저분들이 또 일용할 주먹밥을 권하신다. 아 염치없음이여. 많이 빼지 않고 감사히 먹었다.


▼목동팀 대장의 무릎이 고장나서 Leon까지 점프하기로 했단다. 그정도 거리면 우리가 따라잡기는 어렵다.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아쉽게 작별하고 나니 좀 허전하다. 다시는 닭도리탕도 주먹밥 은혜도 없는거다.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 일상인 까미노에서 사람들은 특별히 아쉬워 하지도 않고 요란하게 반가워 하지도 않는다. 그저 같은 길위에 있고 그러다 보면 같이 살아가는 거다. 


▼이곳이 프랑스길 전체 여정의 중간지점이라하니 축배를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와인을 때리고 잠시 걷는데 Wine Gang들이 모여 있다. 그곳이 중간지점이란다. 백파이프 Johny가 와인을 권했다. 한모금씩 돌리고 같이 걸으며 "When the Saint go marching in"을 선창했다. 한참 그렇게 합창하면서 잠시 우리가 진짜 순례자 된 기분을 느꼈다. 아침 노을의 경고대로 날이 흐려지면서 바람이 불어온다. 비를 머금은 바람이다.




▼Terradillos 역시 쇠잔한 마을이다. 통째 몇십가구 안되 보이는 이곳에서 순례자 말고 달리 찾아올 손님이 있을까 싶었다. 그래도 사람들이 살고 있으면 숨은 생기가 있는 법이다. 마을을 한바퀴 돌다 동네 꼬마들과 잠깐 같이 어울려 공을 찼다.

집들의 반은 무너져 내려 을씨년스럽기 이를데 없다.




▼Irish 모녀 Jean(엄마), Allison Cooke은 내가 James Joyce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으로 화두를 던지자 자기네 집 바로 앞에 죠이스의 기념비가 있다며 약간 반응을 한다. 하지만 데이비드 린 감독의 "라이언의 처녀(Ryan's Daughter)" 이야기를 꺼내자 Jean은 반색을 하고 좋아한다. 딸은 금시초문인 표정. 영화 "Once"에서는 딸과 엄마의 입장이 반전된다.

브론테자매로 이야기를 이어 나가자 엄마는 반색을 했고 딸은 놀라와 했다. Wuthering Heights 이야기를 하며 Heath가 바람에 물결치는 그 언덕을 어려서부터 꿈꾸었다고 하자 엄마가 나보고 틀림없이 half Irish일거라 했다.

책이 고맙고 선생님이 그리워졌다. 즐거운 대화. 덕분에 형편없는 Menu에 신경쓸 틈이 없었다.

아일랜드에서는 건배를 Slante라고 외친다(Spain 이었나?)


날씨가 흐려지며 돌풍이 일어서 알베르게 지붕에 있던 빨래가 날아갔다. 여기도 옵션이 없다. 무조건 알베르게식당에서 저녁을 먹는 수 밖에. 일본인 이오상과 Autrailia Jaqui가 도착했지만 마을의 유일한 숙소인 이곳에 침대가 없어서 다음 마을로 떠났다. 어떤 순례자는 복도에다가 매트리스라도 깔아달라고 항의했지만 이미 그 매트리스조차 동이 난 상태. 쟈키가 떠나자 마자 우박을 동반한 엄청난 소나기가 퍼붓는다. 이오상과 쟈키는 길위에서 고스란히 비를 맞을 것이다. 그게 순례다.


2층침대의 상층이 높고 칸막이가 없어 불안하였다. 한 독일친구가 환기한다며 창문을 열어두어 밤새 떨었다. 바바리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