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기/Stage#14 Hontanas - Boadilla

Stage#14 Hontanas - Boadilla

Stage#14 Hontanas - Boadilla 9.21


새벽길을 혼자 나섰다.

Hontanas에서의 유폐로부터 일찌감치 달아나고 싶었나보다. 

산길을 오르고 내려야 했는데 가끔 어둠속에서 알 수 없는 짐승소리, 벌레소리 등등이 으시시했다.

한참 동안 사람이 보이지 않았는데 멀리 헤드렌튼이 보이자 어찌나 반갑던지.

산을 넘는데 한시간이 넘어 걸린 것 같았다. 어둠 속이라 지형이 파악되지 않으니 좁 답답하다.

혹시 잘못된 길로 들어선건 아닌지 걱정이 되지만 어둠속 산길이라 표지를 찾기도 쉽지가 않다.

산을 내려와 도로를 만나는데 어둠속에서 노란 화살표를 보고 입이라도 맞춰주고 싶었다.

어둠속에서 여자 순례자 한명이 거꾸로 걸어오고 있었다. 오는 길에 지팡이를 잃어버렸다고 길을 더듬어간다.

오후에 그 사람을 다시 보았는데 다행히 지팡이 찾았다고 기뻐하는 모습.


▼Castrojeriz에서 간단한 아침을 먹는다. 8km 남짓 걸었는데 벌써 발이 아파온다. 어둠속에서 긴장한 탓인가보다.

식사 마치고 일어나려는데 목동부부들이 도착한다.



▼이곳은 로마시대 요새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평원을 내려다 보는 전략의 요충임은 문외한도 단박에 알아볼 수 있는데 무너져 내린 역사의 흔적 앞에 잠시 멈춰 과거와의 조우를 즐긴다.


▼여기까지는 착한 평지였는데 나무다리 저편  11시방향으로 오르막이 보인다. 급한 오르막 내리막 다 싫고 완만한 평지가 최고로 아름답다던 Dan의 익살스런 표정이 생각났다. 그는 어디쯤 가고 있을까? 휘어진 허리와 심한 무릎 통증으로 포기했을 수도 있다. 아침햇살이 뒤에서 밀어준 덕분에 18% 경사의 1.2km를 단숨에 치고 오른다.



▼Alto de Mosterales 정상에서 목동부부를 다시 만나 서로 사진을 찍어주었다. 내려가는 길이 콘크리트라 발가락이 아팠다. DSLR을 들고 있는 독일인 Sara에게 말을 걸었다. 그와 한동안 같이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 그녀는 Spiritual Interest에 관해 진지한 태도이다. 눈빛이 신비롭다.



▼노새(mule)를 끌고 맞은 편에서 오는 광경. 당나귀던가? 녀석의 엉덩이에 있는 조가비가 까미노의 농담처럼 보였다.



▼산봉우리 하나를 땀흘려 넘을때까진 좋았지만 마지막 8km가 괴로왔다.

canal(수로)을 따라 밀밭을 걸으며 발바닥의 비명과 소진한 기력때문에 고통.

자주 쉬게 된다. 수로 옆에 앉아 있는데 목동부부들이 늘 그렇듯 종대를 이루며 지나간다. 

저렇게 묵묵히 가다보면 다다르게 될 것이다. 발과 무릎의 고통, 허기와 갈증을 이기고 그곳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스스로 그것을 '축복'이라고 이름할 수 있을 것이다.



▼Boadilla의 Albergue en el Camino는 가이드북이나 다녀온 한인 순례자들 사이에서 강추하는 곳이다. 이곳의 호스피탈레로 에두아르도는 친절하고 재미있는 사람이다. 두어마디 한국말도 배웠다. 

가이드에 따르면 축사를 개조해 만든 곳이라 하는데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오래된 목조 대들보 밑, 2층침대에서 틀림없이 엄청나게 코골게 생긴 놈 위에서 자야한다. 늦게 도착한 WC는 바닥에 매트리스 깔고 자야한다. 샤워실은 넓었다.


▼뒤뜰 정원이 정겹고 자그마한 풀장이 있어서 부어오른 발을 담그고 햇삧을 쬐기 좋다. 잔디밭 여기저기에 뒹굴며 책을 읽기도 하고 잡담하면서 까미노의 오후를 즐긴다. 풀사이드에서 루퍼트, 안드레이 등등과 농담질.

순례의 여정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멈추고 머뭇거리며 시간이 간다.



▼방랑시인 Andrew와 Sarah는 조금씩 가까워져 간다. 헤어지고 만나고 짝 지으며 사랑하며 배신하며 생존하며 길을 간다.



Boadilla 성당앞 벤치에 누웠다. 씨에스타 시간. 도무지 사람이 살고 있는 것 같지 않은 적적한 마을. 바람도 잠시 멈춘 듯.

길에 집중하고자 애쓴다. 하지만 치밀어 오르는 생각들, 털어내지 못한 분노와 욕심, 오만과 조잡한 상상들이 여전히 먼지처럼 달라붙어 있다. 어떻게든 길에 쏟아버리고 내가 길과 하나되어 내가 길을 걷고 길이 나를 운반하는 판타지를 상상해본다.

기대해 본다. 


저녁식사시간 알베르게의 모든 사람들이 같이 식사를 하고 마치면 나가는 길목에서 에드아르도가 돈을 받는다. 

vino건 beer건 술은 당분간 금지. 차라리 콜라를 마시자. wifi 연결을 구하지 못해 계속 가족과 불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