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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Stage#13 Burgos - Hontanas

Stage#13 Burgos - Hontanas

Stage#13 Burgos - Hontanas 9.20


혹독한 하루. 고등학교 지리시간에 나왔던(물론 전후맥락 거두절미하고 단어만 기억된다) 메세타 고원지대 31km를 가로질른다. 머리위엔 지글거리는 태양이 발바닥 아래에는 딱딱하게 말라붙은 대지가 허기진 순례자를 샌드위치 하고 하루종일 지져대는 하루. 멀건 가깝건 어느 하루 편하고 쉬운 길은 없다. 


▼새벽에 알베르게를 나와 산타마리아 성당을 가로지르는 길에 외로운 순례자상과 잠시 마주했다. 


▼YS JK가 동행이 되어 서로 의지하고 걷는다. 저멀리 여수부부가 지나간다. 


▼도시를 빠져나가며 일출을 맞이한다. 기찻길이나 고속도로를 만나면 가족들 생각이 나서 걸음을 더 빨리하게 된다.


▼때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지만 침묵모드로 진행하기도 한다. 고원지대에서는 다들 힘들어서 싸이클 단체추발 방식으로 선두바꾸기 게임을 했다. 한사람이 앞서서 적당히 걷다가 지치면 뒤로 빠지고 그러면 다음 사람이 선두로 나서는거다. 당연히 속도가 빠르고 체력소모가 급격해 진다. 


▼출발한지 4시간쯤 지나 점심을 하기로 했다. Hornillos del Camino 쯤으로 기억되는데 정확하진 않다. 아이폰으로 찍어두었으면 GPS로그가 남아있을텐데 Leica로는 불가능. 동네 가게 아저씨의 이름이 Jesus이다. 길가에 앉아 음식 먹는 일이 질색이라 교회당을 찾아 계단에 앉았다. 어느 마을이나 광장과 성당이 있고 샘이 있다. 


▼마지막 5km가 힘들었다. 꽤 걸었는데 지평선 저 너머까지 도무지 마을이 보이지 않는다. 오후 3시가 넘어서면거 태양도 도가 지나치게 뜨거워지고 바람 한점 없어서 몸이 벌겋게 달구어지면서 탈진하는 느낌이 들무렵... 느닷없이 길이 주저앉으면서 분지 속에 마을이 나타나는데 이게 Hontanas다. 사전에 가이드북을 읽지 않은 덕에 즐거운 서프라이즈. Hontanas는 샘이란 뜻이란다. 이 마을은 순전히 순례때문에 생겨나고 그로 인해 유지되는 오지마을. 화살표가 제각각이다. 다른 곳으로 빠질 염려도 없는 외길인데.



▼이런 날의 샤워는 정말 아름답다. 샤워하고 한국인 순례자들이 모여 같이 밥을 먹었다. 목동부부께서 준비한 밥과 정체미상의 찌개에다 화룡점정 누룽지까지 잘 대접 받았다. YS와 합작으로 엉터리 상그리아를 만들었다.

빨래줄은 늘 만원이다. 계단에다 빨래를 넌다. 바지는 아랫단만 지퍼를 열어 빨아넌다. 거친 하루를 마감하는 전리품. 


▼짐풀고 샤워하고 빨래하고 마을에 나서면 일정이 걸음이 비슷하여 눈에 익은 순례자들을 만난다. 마을이 작은 탓에 달리 둘러볼 데도 없다. Dexter는 여전히 스마트폰을 붙잡고 있고 YS는 음식촬영, JK는 그런 YS 구경, 저멀리 Wine Gang들은 여전히 마시고 있다. 일상은 단순해지고 사람들도 변함없다. 평화다.


▼일용할 양식을 만들어주고 늘 따뜻하게 한국인 일행들을 대하시는 목동아줌마들. 독실한 캐톨릭인 그들은 순례중 길에서 성경을 읽고 찬송가를 부르면 진정한 '순례'의 모범을 보인다. 


▼일본인 이오상은 올해 1월에 일본의 집을 떠나 세계를 방랑하고 다닌다. 몇차례 같이 걸었지만 소통이 어려웠는데 일본서 자란 YS를 소개해주었다. YS의 일본어는 네이티브 수준. MJ까지 한일 lady들의 수다잔치. 



▼Rupert from Austrailia가 먼저 말을 걸어온 것은 내가 맥주와 소다를 섞어 폭탄주를 만들고 있을 때였다. 호주에도 그런 칵테일이 있다는거다. 나는 한국식 폭탄주에 대해 설명했고 자기도 그거 좋다며 저녁때 한잔 하자고 제안해왔다. 영화팀에서서 일을 한다는 이친구에게서 던디같은 좀 무모하고 거칠고 장난스런 분위기가 느껴져 단박 친해졌다. 이 친구들이 와인을 자주 마시는 것 같아서 "니들은 Camino de Santiago로 가는게 아니라 Camino de Vino를 찾아가는 거지?"라고 조크 하니 Rupert가 좋아한다. 와인은 까미노의 필수과목이다. 바게뜨와 와인, 매우 복음적인 소재 아닌가.


▼흰머리소년 H도 Wine Gang들과 일행이었는데 두루두루 친구들을 소개시켜 주었다. 


▼해가 기울어 테이블은 바뀌었지만 이 황막한 북스페인의 오지 Hontanas의 청춘들은 도무지 잠들 생각이 없고 마시고 떠들고 쓸쓸해 하며 밤을 맞이한다. 밤이 되어도 함께 있다는게 다행이지 않은가.


▼내 Leica를 보더니 Rupert가 자신의 카메라를 들고 나오길래 결투를 제안. 서부 무법자들처럼 먼저 뽑아서 플래시 터뜨리는 쪽이 이기는 게임인데 1:1 아직 그로부터 내 사진을 받지 못했다.



▼루퍼트 일행중 Montana에서 온 Johny는 스코티시 백파이프를 분다고 한다. 그에게 한곡 듣고 싶다고 하니까 지금은 별로 컨디션이 안좋다고 튕긴다. 그런줄 알고 잠자리에 들려는데 바람결에 실려 어디선가 백파이프 소리가 들려왔다. 후닥닥 언덕에 올라 소리 나는 쪽을 찾아보려 했지만 실패. 이 자식 신비주의구나.

Hontanas는 갇혀 있는 기분이 들게 한다. 카프카의 '성'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