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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Stage#5 Puente la Reina - Estella

Stage#5 Puente la Reina - Estella

Stage#5 Puente la Reina - Estella

22km


새벽을 사랑한다.

차분하고 고요한 열망의 신새벽, 그 순수함을 맛본다.

그래 지난 과거는 잊자. 혼탁했던 시절의 먼지 털어내고 아침의 차가운 공기로 머리도 가슴도 새롭게 하는거다.

미련없이 작별하고 새롭게 만나는거다. 

맨처음인것처럼 그렇게 수줍게 조심스럽게 맞이하는거다 새날을.

▲마을을 빠져 나오며 다리 건너기 직전에 몸을 돌려 마을을 본다. 개를 데리고 아침 산책하는 주민과 막 길을 나선 순례자.

▼차도를 따라 오르막을 걸어야 한다. 내리막에 진저리쳤다고 오르막을 사랑한다 한적 없다. 하지만 뭔가 걸음이 가벼워진 느낌이다. 아하 오늘이 닷새째. 종아리와 대퇴부의 각종 근육들이 서서히 단단해지기 시작했나보다. 특히 심장의 여러갈래 혈관들이 모처럼 시원하게 들어오는 피, 나가는 피를 힘차게 순환시키며 산소와 영양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거친 호흡 속에서 뱉어지는 열기와 수분을 통해 집착과 미련, 후회와 좌절, 분노와 울분의 찌꺼기들이 함께 배출되는 것이다. 오르막의 특권인 셈이다. 구름이 낮게 깔려 온종일 뜨거운 태양을 피할 수 있는 것도 행운이었다. 닷새째, 이제 본격적인 순례의 리듬에 몸을 싣는다.


▼언덕을 넘으면 작은 마을 Maneru를 지나는데 오래된 건물 사이로 어떤 놈이 현대식 빌라를 지어서 그림을 망쳐놓았다. 미워서 눈 흘기며 그냥 지나치길 잘했다. 저 멀리, 중세의 나팔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템플기사단의 우렁찬 말발굽소리따라 용감무쌍 말없이 순례자들을 지켜주고 순정 따윈 난 몰라하던 기사단들이 금방 튀어나올 것만 같다. 시라우키(Cirauqui)는 마을 꼭데기의 교회를 중심으로 오래된 건물의 배치가 잘 보존된 마을이다. 옆길로 새서 마을을 돌아나갈 수도 있지만 아무리 오르막내리막이 귀찮아도 반드시 중앙을 돌파해야 한다. 올라가면 성당앞에 스탬프도 비치해 두었다. 


▼Cirauqui직전에 있는 오래된 공동묘지. 길에서 올려다 본 스카이라인이 보기 좋았다. 올라가서 둘러볼까 잠시 망설였는데 그냥 통과. 후회하지 않는다. 


▼가로등 확 뽑아버리고 싶었다.


▼ 시루아키를 지나 다시 지루한 포도밭길을 걷다가 벨기에대학생들을 만났다. 여자아이는 영어가 무난. 미래에 대한 기대 세상에 대한 호기심 등 기억이 가물가물한 '주제'들로 한시간 같이 걸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이들은 총 일주일 정도 걷고 벨기에로 돌아간다고. 다음에 다시 올거라 한다. 그렇다 까미노는 유럽의 산책로이다. 


▼자밀Jamil은 브라질에서 왔다. IT관련 비지니스를 한다고 하는데 이런저런 이야기가 잘 통한다. 요령있고 영악한 친구같아 보인다. 앞에 놓인 음료수 아쿠아리우스를 자주 마시게 되는데 포카리스웨트 비슷한 이온음료. 길가에 좌판 벌려 놓고 장사하는 현지인들이 간혹 있다. 아직 많지는 않은데 까미노스럽지는 않은 것 같다.



▼"The Way"에서 아일랜드 작가가 요란방정 떠는 씬이 있는데 이쯤에서 촬영했을 것 같아 보인다. 도로가 멀지않아 발전차나 분장 트레일러 주차하기도 알맞고 스카이라인도 나쁘지 않다. 그런 생각하다가 MJ를 만났다. 팜플로나 입구에 있는 Villava 마을로 건너가는 중세의 다리, Puente Trinidad de Arre에서 비틀거리며 걷던 친구이다. 함께 걷던 프랑스 아줌마(한국아줌마인데 프랑스에서 사는)는 발병이 나서 철수했다고. 그녀의 배낭이 문제였는데 길에서 장사할 것도 아닌데 엄청 많이 담아왔다. 본인도 그땜에 힘들어한다. 지팡이는 까미노에서 만난 한국 아저씨가 손수 다듬어 주신거라 한다. 이런저런 얘기나누면서 동행이 되지만 오래가지 않아 각자의 속도로 헤어진다. 


▼인구 1만5천의 도시 에스떼야(Estella)에는 아웃도어 전문점도 있다. 판초나 지팡이 등을 미처 구입하지 못한 사람들이 구하러 가는데 나는 라이너 양말을 한켤레 더 살까하고 들렀지만 없었다. 에스떼야의 알베르게는 장애자를 지원하는 단체에서 운영하는 곳이라는 안내를 보고 찾아갔다. 작은 부엌이 있었고 썩 깔끔하지는 않았지만 호스피딸레로들이 친절하고 괜찮은 곳이었다. 


▼마실 나가다가 데이지와 같은 이름의 상점이 있어서 장난삼아 마네킹 같은 포즈 취하라고 했더니... 


역시 제이미는 먼저 도착해 있었고 나머지 Morgan 식구들은 한참 지나서 도착. 다들 함께 다운타운으로 나갔다. 가는 길에 MJ와 여수댁, 목동부부 등 한국인들을 만났다. 다른 알베르게 마당에서 저녁식사 중이었는데 간단하게 인사. 저녁의 마을은 아이들로 활기를 띈다. 여기서도 또 씨에스타 때문에 말썽이다. 정확히는 씨에스타에 따른 저녁 스케쥴을 우리가 아직 감잡지 못한 탓이다. 저녁 여섯시인데 식사가 안된단다. 여덟시부터 저녁이란다. 기다리기로 하고 나는 아웃도어 샵에 볼일보러 갔다 왔는데 다들 없어지고 댄 혼자 우두커니 앉아있다. "애들은?" "배고프다고 먼저 가버렸어""이런 팍 배라먹을 놈들. 아니 아버지 혼자 남겨두고?" "그러게 말이야 에휴" 그래서 댄에게 내가 살테니까 배터지게 우리끼리 먹자고 했다. 순례자로서 약간의 죄의식은 느끼면서 디저트까지 풀코스로 즐겼다. 

▲댄의 뒷모습을 몰래 찍었다.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떠올렸다. 코엔형제의 탁월한 이 영화의 타이틀은 아일랜드 시인 예이츠의 "비잔티움으로의 항해"에 나오는 싯구에서 따온 것이다. 돈만 있어봐라 사방천지가 노인을 위해서 존재한다.

▲음식에 관해 스페인의 이해할 수 없는 약점은 신선한 샐러드가 없다는 점. 다들 와인막 먹나보다. 나바레 지역의 이 와인은 메뉴에 포함되어 '공짜' 추가는 2유로(믿거나말거나) 아이스크림으로 깔끔한 마무리. 좀 심하긴 했다.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 여인을 처음 본건 첫날 피레네 넘을 때 롤랑의 샘에서 였다. 표정이 밝고 붙임성이 좋은 바스크여인. 바스크! 느닷없이 카메라 들여대는 장난에 깜짝 놀랐는데 친구들 하고 정식으로 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