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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Stage#3 Zubiri - Pamplona

Stage#3 Zubiri - Pamplona

Stage#3 Zubiri - Pamplona

20.4km


초반페이스를 잘 조절하는게 중요하다는건 여러 가이드에서도 강조되어 있다. 첫 일주일을 잘 넘기면 체력도 보강이 되고 걷는 요령도 생겨서 점점 쉬워지고 즐거움이 더해 간다는 얘기다. 그 얘기 굳게 믿기로하고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어젯밤 다니엘이 버스 타고 가야하는 이유를 충분히 설득시켰다. "만약에 지금 허리가 고장이 나면 까미노는 그걸로 끝이다. 까미노는 시험이 아니라 힐링인데 당신 자신을 학대하는건 옳지 않다" 그는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어떻게 될지는 모를 일이다. 그렉과 데이지에게 그를 당부하고 먼저 길을 나섰다. 


Zubiri를 떠나고 두시간이 채 못되어 Larrasoana에 이른다. 꽤 많은 가이드에서 Stage#2의 기착지로 추천한 곳이다. 수비리보다 정감 있고 까미노의 전통이 녹아 있는 동네이지만 둘째날 체력으로는 이까지 오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잠시 머물러 커피 한잔의 휴식을 취한다. 땀을 뻘뻘 흘리며 반대편으로 걷는 여자가 있었다. 무슨일이냐고 물었다. 같이 걷던 친구가 숙소에다 뭔가 두고 와서 찾아주러 가는 길이란다. 왔던 길 되돌아가는 불상사 없기를 바란다. 그녀 누군가를 닮았다. 캔디스 버겐.  두세시간 걷고 나서 다시 휴식을 취하다가 재미있는 광경을 목격.

▼여자가 거친 걸음으로 걸어 들어와 땅바닥에 펄썩 주저 앉는다. 잠시후 오른쪽에 남자 느리게 와서 앉는다. 남자 뒤를 돌아보다가 여인에게 접근 뭔가 애절하게 하소연. 여자 강하게 머리 흔든다. 남자 힘없이 돌아서 길을 간다. 외면하던 여인 남자가 완전히 사라지자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낀다. 급기야 머리칼을 쥐어뜯는다. 까미노의 '아침드라마' 한편 보았다.

▼차도 옆에 나있는 언덕을 넘어올때 한국여자 두명이 비틀거리며 올라가는 걸 만난다. 괜히 격려하고 싶어 껌 하나씩을 건네고 난 그냥 달렸다. 언덕이 꽤 지루하였는데 길따라 내려오면 Ulzama강을 넘어가는 중세의 다리를 건너 트리니다드 수도원을 지나간다. 깔끔한 교외마을 Villava에 들어서면 Pamplona가 멀지 않았음을 알게 되는데 샘이 있어 잠시 쉬어간다. 비틀거리던 한국여자 MJ가 멀리 다리를 건너온다. 함께 걷던 프랑스아줌마의 비참한 발가락을 본 것도 이때다. 그렉과 데이지와 합류 같이 Pamplona에 들어간다.


Pamplona


팜플로나(Pamplona)는 스페인 17개 자치주 중 동북에 위치한 나바라(Navarra)주의 주도이다. 인구 20만이 넘는 비교적 큰 도시이고 소몰이 San Fermin축제로 유명한 곳이다. 골목에다가 황소 풀어놓고 사람들과 뒤엉켜 달리는 놀이를 하는데 실제로 많이 다치고 죽기도 한다. 헤밍웨이가 오랫동안 머물었는데 그의 소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에서 소몰이가 소개되어 유명해졌다 한다. 스페인을 다니다보면 곳곳에서 헤밍웨이를 만난다. Zubiri에도 그가 송어낚시 하던 곳이라는데가 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스페인 내전이 배경이다. 헤밍웨이. 기자출신, 1차대전 참전, 독재자 프랑코에 대항하여 스페인 내전에도 참전, 간결한 문장, "노인과 바다" 퓰리처상, 노벨상 수상, 큐바에서의 생활, 엽총자살, 영화배우가 된 손녀딸... 참 다이나믹한 인생을 살다 간 사람이다. 팜플로나의 골목을 지나다가 우연히 사라사테 기념관을 보았다. 지고이네르바이젠의 작곡가 사라사테가 이곳 출신이란다. 사춘기 시절 좋아했던 바이얼린 곡이다.


▼데이지의 스페인어 덕분에 현지인들과 편하게 이야기 할 수 있었다. 까미노에서 만나게 되는 주민들은 대부분 순례자들에게 호의적이다. 물론 순례자가 관광고객이기도 하지만 까미노길의 많은 도시들이 순례때문에 생겨났고 중세때 정책적으로 이주한 사람들도 많았다 한다. 팜플로나도 순례자들이 협동조합 형태로 집단 거주하면서 원주민들과의 알력도 있었다 한다. 즉 많은 주민들은 조상때부터 순례자들이 동지였고 가족이었다. 



BASQUE 


스페인 북부 바스크자치주와 나바레, 프랑스쪽 피레네 산맥에 걸쳐 사는 바스크족은 인종, 관습, 문화, 언어가 완전히 다른 독립된 민족이다. 용감하고 싸움 잘하며 매우 독립적이어서 스페인의 대부분이 이슬람 지배하에 있을 때도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다 한다. 바스크자치주의 주도는 구겐하임 박물관이 있는 빌바오이다. 한때 바스크 분리주의자들의 테러때문에 스페인이 몸살을 앓았다. 최근에는 이렇다할 사고는 없었지만 아직 불씨가 꺼진 것은 아니다. 종종 뉴스에선 낯익은 화염병 비스무리가 등장한다. 순례기간 중에는 까탈루니아지방(바르셀로나를 포함하는 지역, 스페인에서 비교적 부유한 지방)도 독립을 위한 지방투표를 한다고 해서 떠들썩 했다. 언어도 종족도 다른 연방국가. 팜플로나는 주민 대부분이 바스크 사람들이다. 순레길 입구에 분명한 영역 표식을 해두었다. 영역을 지키려는 건 동물의 본능인가보다. 세렝게티 사자들 보면 맨날 돌아다니며 오줌싸는게 그짓이다. 길을 따라가다가 집시거주지를 지난다. 데이지가 알려주었다. 집시는 생김새가 다르다고 했다. 이날 저녁 수퍼에서 집시 소녀가 장보러 온걸 봤는데 데이지 말대로 인종적 특징이 느껴졌다. 거지 도둑으로 표현되는 집시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많지 않다. 영화 '"The Way"에서는 집시의 자존심, 명예를 알리려고 의도한 씬이 있다. 



▼서울서 온 여대생 HJ. 등산화끈 고쳐 매다가 포즈 취해준 그녀는 내 친구 장교수가 있는 대학의 공대생인데 휴학하고 이곳에 왔다. 문제는 이 사진 다음. 사다르강의 보행자 전용 다리 넘어와서 이 사진 찍은것 까지는 좋았는데 노란 화살표를 잘못 확인해서 길을 잃었다. 무니시팔 알베르게를 찾아가야 했는데 여기서 공원길따라 성곽까지 올라가고 오가며 한참을 헤맸다. 항상 그랬지만 "도시에서 길을 잃다" 팜플로나까지 힘겹게 왔는데 여기서 헤매면서 완전 탈진. 겨우 알베르게 찾았을 때 또 새로운 문제. 먼저 와 있기로 한 로드러너 제이미가 없다. 그렉과 데이지가 새로 지어서 산뜻한 알베르게 1, 2층을 온통 뒤졌는데 없다. 제이미가 이곳에 왔다가 일행이 오지 않으면 침대를 배정할 수 없다는 말에 사설 알베르게로 옮겼다는 걸 알게 되었다. 정말 지치는 순간. 어쩔 수 없이 다시 배낭 짊어지고 사설 알베르게를 찾아 도시를 가로 질러갔다. 배가 고팠다.

▼구시가지를 빠져나오면서 소몰이 경기장을 지나왔다(소들의 종착지)


▼다리 건너 팜플로나에 들어온게 두시가 채 안되었는데 이곳에 도착한게 4시. 오늘은 짦은 구간이라 일찍 도착해서 유명한 팜플로나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녀 보자 마음 먹었던게 수포로 돌아갔다. 그나마 위안 받는건 숙소 이름. 헤밍웨이랑 아무 관계가 없어보이는 호스탈이지만 알게 뭔가, 그가 여기서 빈둥거리며 원고를 만지작거렸을 수도 있는거쟎아. 호스탈 헤밍웨이는 좀 젊은사람 취향으로 꾸며진 곳인데 순례자 뿐만이 아니라 일반 여행객들도 받는다. 순례자들에게는 특별할인을 한다는데 그래서 19유로, 엄청 거액이다. 소몰이축제 때는 가격도 수십 수백배 뛰고 방도 없다 한다. 


▲배가 고플대로 고픈 우리는 얼른 레스토랑을 찾기로 한다. 근데 또 시에스타! 길가는 사람 붙잡고 데이지가 열심히 영업하는 식당을 물어봤고 그들이 여기저기 추천해 주었지만 정말, 정말 모두 다 문 닫았다. 미리 봐둔 근사한 레스토랑은 저녁 9시부터 영업하니 그때 오라고 한다. 할 수 없이 레스토랑은 포기. 다행히 대도시라 대형수퍼는 문을 열었다. 장을 봐서 이번 까미노 처음으로 밥을 해먹는다. 스파게티. 맛? 하루 종일 한끼도 못먹고 얼마나 배가 고팠겠는가. 그저 감사할밖에. 

▼저녁은 초라했지만 디저트는 포기할 수 없어서 우리는 아이스크림 가게를 찾았다. 남녀노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이스크림은 위대하다. 해가 어둑해지자 사람들이 하나 둘 나타난다. 해가 뜨면 들어가고 해가 지면 나타나는...

▼아이스크림때문에 오늘은 해피엔딩이다. 연거푸 이틀 씨에스타에 당했다. 무서운 놈이다.


다행히 다니엘은 버스를 이용해서 이곳에 왔고 덕분에 원기를 많이 회복했다. 까미노를 고행으로 생각할 순 있지만 한계를 넘으려 모험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그 한계가 과연 어디인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