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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Stage#1 Saint Jean - Roncesvalles

Stage#1 Saint Jean - Roncesvalles

Stage#1 Saint Jean Pied de Port - Roncesvalles 

27km


출발


아직 해가 뜨려면 멀었지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주섬주섬 짐을 챙긴다. 다들 잠을 설친게 분명하다. 어젯밤에 한방을 배정받아 룸메가 된 일행은 독일인 한스남매(사촌간), 스웨덴인, 두번째 까미노에 나선 프랑스인 뱅상, 일본인 다나까, 나까지 모두 여섯이다. 식당에선 알베르게에서 무료로 주는 아침식사가 준비되어 있다. 빵과 커피. 순례자의 아침스럽게 단출하다. 무조건 먹어두어야 한다. 어제 순례자사무실에서 만났던 포루투갈인 호스피탈레로(자원봉사자) 나테르시아(Natercia)가 새벽부터 나와서 순례자들을 도와준다. 

"까미노를 걸으며 넌 많이 웃고 행복하게 될거야" 

어제만 16명의 한국인들이 피레네를 넘었다고 한다. 

다나까는 아시아의 단결을 위해서인지 계속 "장쌍!"을 외치며 뭉쳐 다니고 싶어한다. 그는 일본 알프스를 완주했다고 자랑한다. 그의 계획은 까미노 도중에 차 타고 점프해서 시간을 줄이고 독일의 옥토페스트에 참가할거란다. 맥주와 소시지 먹으러 가기 위해 까미노 월반하다니 신성치 못하다. 어쨋건 다나까와 스웨덴이 한팀으로 그룹지어 한꺼번에 출발하여 스페인문을 통과 공식적인 프랑스길 출발지점인 다리를 넘어간다. 아직 어둡다. 어두운 골목 이곳저곳에 벌서 순례자들의 모습이 보인다. 길 찾느라 고생할 거 같지는 않다. 그래도 오르막길에 만난 첫번째 노랑 화살표! 아 저게 그거구나 반갑다. 앞으로 갈수록 점점 반가와질거다. 노란화살표.

▲ 왼쪽이 스웨덴, 오른쪽이 다나까. 골목에 울려 퍼지는 지팡이소리가 인상적이다. 문 열어둔 가게 하나도 없다. 

따라서 어제 점심 준비 못한 나같은 사람은 그냥 갈수밖에. 그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오후에 절실히 깨닫는다.


피레네를 오르는 것은 북한산이나 지리산 올라가는 것과는 분명히 다르다. 우리의 산들은 출발해서 도착할 때까지는 그냥 발보고 가거나 앞사람 엉덩이 보는 수 밖에 없다. 가끔 올려다보며 아직 정상이 가마득한데서 오는 실망감을 달래가며 가야하는데 거기 비하면 피레네는 계속 '볼거리'를 제공한다. 길따라 온통 목초지라서 시야가 열려있기때문이다. 대관령 삼양목장이 계속된다고 생각하면 쉽다. 따라서 덜 힘들게 느껴진다. 이건 객관이고 나의 주관은 상당히 다르게 느낀다. 첫날이 제일 어렵다는 정보를 알고 왔고 그에 각오를 하였지만 계속 남들에게 추월당하기만 하고 경사가 좀 급해지면 자주 쉬어야 하는 통에 이대로라면 완주가 어렵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앞섰다. 그것도 초반전에. 다나까는 아시아의 단결하고는 상관없이 사라져 버리고 스웨덴도 보이지 않는다. 헉헉거리며 좀 비참한 생각이 드는데... 해가 뜬다. 아침해라는게 이런거다. 이렇게 지치고 절망적인 마음에 다가와 격려해주고 품어주며 용기를 준다. 아침해, 아침햇살. 만약에 마누라가 아브라함 부인처럼 세째아이를 낳는 기적을 일으키면 (딸이라치자) 그 아이 이름은 아침햇살이다. 장 아침햇살.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다"는 속담이 때로는 바리에이션 될 필요가 있다. "오르막이 있으면 또 오르막이 있기도 하다"

비로서 배낭을 내려놓고 햇살을 마음껏 즐긴다. 그렇지 배낭 내려놓고 쉬엄쉬엄 가면 될거 아닌가. 하는 차에 달팽이 한마리가 배낭옆을 기어간다. 초슬로모션이다. 무슨 말인지, 계시인지 알겠다. 


▲ 장 아침햇살이 나의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햇살 샤워. 옷 벗고 제대로 못한게 아쉽다. 이때 이미 땀에 흠뻑 젖었는데. 그래서 기능성 옷이 중요하다. 면으로 된거 입으면 온종일 물에 빠진 생쥐 모양된다. 좋은거 입어야 한다.

▲아직 사람이 드물다. 새벽에 출발한 탓이다. 

위 사진 둘은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촬영한 것이다. 노출 어떻게 주느냐에 따라 사진의 느낌이 달라진다. 어두운 부분 살려서 다같이 밝게 보는 HDR은 그래서 현실감이 없다.

▲이때부터는 자주 쉰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은 나보다 걸음이 느린게 아니라 늦게 출발한거다. 하지만 하루 종일 추월당한다. 추월 당하다니! 그렇다 첨부터 난 달리기 시합한거다. 경쟁에서 앞서고 바쁘고 전후좌우 살피면서 우선 내자리 확보해야 안심하던 수십년간 버릇이 어디 가겠는가. 까미노를 걸으며 내내 힘들어 했던게 그놈의 경주, 레이스(race) 정신이었다. 까미노를 걷기에 가장 알맞은 속도는 내 걸음속도(Good speed is your speed)라는걸 알면서도 막상 길에서면 매번 레이스 충동을 떨치지 못하였다.   

▲ 목가적이다. 시야가 훤히 열려 있고 초원을 바라보고 걸으니 힘든걸 느끼지 못한다. 

▲ 겁 먹을거 없다. 이 길은 특별한 길. 여기서 죽으면 순교하는거다. 어떤 죽음인들 아픈 사연 없는게 어디 있으랴. 까미노를 걸으며 적지 않은 십자가를 만나게 된다. 걸음을 잠시 멈추고 십자가 앞에 서면 삶과 죽음의 경계를, 그 가깝고 연약한 미래를 바라보는거다. 지금 살아있음에 감사하는거다. 



▲인적이 끊이지 않는다. 

▼모두 다 까마득 멀어져 간다. 숨은 가빠오고 다리는 후달거린다. 아직 반도 안왔다는게 믿어지니? 

웬 젊은 서양여자애가 거의 구보속도로 지나치며 인사를 한다. 엄청난 속도라서 기가 막혀 한동안 바라보았는데 나중에 내 친구가 된 Daniel Morgan의 딸 Jaime였다. 그녀는 늘 너무 일찍 도착해서 문제였다.


Orisson에 도착한게 오전 9시 30분경이다. 미리 가이드북을 보고 공부하지 못한 탓에 오리손을 지척에 둔 코너에서 휴식하는 멍청한 짓을 했다. Orisson 산장은 야외데크에서 피레네를 바라볼수 있어서 좋긴 했는데 레스토랑의 경우 몰려드는 순례자들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우리는 주문이 서툴러서 머뭇거리다보면 뒤에 있는 스페인, 프랑스 친구들이 계속 먼저 채간다. 결국 제일 평범하고 주장없는 바게뜨 샌드위치를 살 수 밖에 없었는데 그냥 바게뜨 안에 하몽 한조각 들어있는 거다. 그나마 데크에 앉아 퍼지기도 싫어서 그냥 배낭속에 쑤셔 넣고 길을 떠났다. 이래저래 첫날 시행착오가 적지 않다. 다시 실수 안하리라 마음 먹지만 사람이란게 했던 실수 또 하는 법이다. 점심 걸르는 일이 많아지게 된다. 





Buen Camino Amigo!


▲ 자전거로 순례길을 가는 사람들도 상당수다. 물론 훨씬 짧은 기간에 까미노를 주파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까미노의 순수성을 해친다고 걱정하기도 하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 스페인 정부 입장에서는 걷거나 뛰거나 자전거나 다 마찬가지인 '관광상품'일 것이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늘 저렇게 인사를 한다. "부엔 까미노" "올라" 그냥 "굿모닝" 이나 "하우 아 유"보다 좋다. 까미노이니까.


 

얘랑은 처음부터 인연이 아닌가보다 했다. Orisson에서 허겁지겁 주문해서 준비한 바게뜨 샌드위치가 하도 맛이 없어서 한입 베어 물고 배낭에 쑤셔두었는데 성모상에 도착해서 쉬는 동안 배가 너무 고파서 어쩔 수 없이 먹었다. 음식을 이렇게 미워하면서 먹어야 하다니.

많은 순례자들이 재료를 사서 요리를 해 먹는다. 저녁에 숙소에 도착하면 장을 봐서 해먹는데 첫째, 알베르게에 취사시설이 있어야 하고 둘째, 혼자 요리해 먹으면 재료가 감당이 안되니 나누어 먹을 수 있는 팀이 있어야 한다. 제일 많이 먹는게 스파게티. 세상에 간단한 요리이다. 물론 준비만 된다면 라면이 압도적으로 우세하겠지만 그거 배낭에 싸서 걷는 것도 만만치 않고 라면 파는 슈퍼 거의 없다. 그래도 라면에 고추장 김치 밑반찬 싸온 대단한 한국인들 종종 보았다. 먹는거 중요하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건 아니라고 본다. 겸손하게 먹으려 애썼다. 첫날 악연을 맺은 바게뜨는 어떻게든 피하려 애썼지만 저놈 안사면 탄수화물을 달리 방법이 없다. 왜 넙더부리 식빵은 안먹는지 모르겠다. 샌드위치백작이 영국놈이라 그런가? 대형수퍼에나 넙적한 식빵이 있고(그것도 제과점 빵 아닌 비밀 포장) 그 외에는 죄다 바게뜨. 스페인 친구들은 바게뜨를 포장도 안하고 덜렁덜렁 배낭에서 꺼내 먹는다. 하기사 남아메리카며 필리핀까지 도적질 다니려면 냄비 들고 솥 걸고 할 시간 없었을거다. 러시아인들도 여행갈 때 그들의 빵 흘레브를 갖고 다니며 기차 안에서 잘때 베개로도 쓴다고 했다. 


▲ 티벳의 주술적 천조각 같은 걸 잔뜩 매달아 놨다. 십자가랑 부조화. 여기서부터는 비포장이다. 오른쪽으로 가면 비상대피소도 있다. 겨울에는 종종 악천후때문에 위험하다고 한다. 실제로 사람이 실종되거나 다치는 사고도 있다 한다. 그래서 겨울 또는 눈비가 심한 악천후 때는 계곡들 둘러가는 우회로를 권하고 있다.


롤랑의 샘 

Fountain of Roland


중세의 스페인은 이슬람과 카톨릭이 양분하여 지배하고 있었다. 782년부터 1492년 이사벨라 여왕(콜럼부스가 인도에 가서 금 가져오겠다고 꼬셔서 돈 받아간 그 아줌마다)때 레꽁끼스따(Reconquista)가 완성되어 이슬람 세력을 이베리아반도에서 몰아내기까지 끊임없는 전쟁이 이어진다. 롤랑 또는 롤랭(Roland) 8세기 당시 프랑스의 왕 샤를마뉴의 조카로서 프랑스를 대표하는 훈남, 잘나가는 슈퍼스타 기사였다. 778년 왕명을 받들어 스페인에 가서 사라센왕 하고 평화협정 맺고 돌아오는 길에 계부 가늘롱이 배신을 때린다. 후위를 맡은 롤랑의 특공대들은 바스크족의 기습으로 전멸한다. 몇백년이 지나서 어떤 글쟁이가 이 이야기를 소재로 무훈시(또는 서사시)를 썼는데 그게 프랑스 최초의 서사시 '롤랑의 노래'이다. 그 당시 롤랑이 싸움하러 피레네를 넘나 들며 마셨다는 샘이 실제로 산위에 자리하고 있다. 놀랍게도 산 꼭데기에 샘이 있는 것이다. 주위에 아무데도 개천이나 샘이 없다. 아무리 가물어도 이 샘에서 물이 마르지 않는다 하니 정말 귀한 샘이다. 미리 준비했던 물도 다 떨어진 터라 감사히 물을 마시며 약속했다. 순례 마치고 돌아가면 그책 꼭 읽으리라(아직 못 읽었다) 이곳은 샘은 좋으나 앉아서 쉴 곳은 마땅치 않다. 사람들은 길가 철조망 옆에 쭈그리고 쉰다. 한참 쉬면서 바스크족 여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바스크... 그때 롤랑 죽인 죄값을 치르는 걸까 아직 제나라 갖지 못하고 스페인, 프랑스에 대충 걸쳐서 살면서 가끔 데모만 한다. 한때는 바스크 분리주의자들의 무력시위가 사나왔었는데 요새는 소식이 없다. '롤랑의 샘' 전설의 생명수로 목을 축이는 축복. 첫날부터 쨍한 기분의 연속이다. 그나저나 도대체 롤랑과 그 부하들이 전멸한 계곡에는 언제쯤 도착할 수 있을까. 다나까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썡장의 룸메는 한명도 만날 수가 없다.


▲한산해 보이지만 실제론 물 받아가는 사람들의 줄이 꽤 길다. 목마른 자들이 그만큼 많은 것이다.

▲드디어 국경이다. 검문소 같은거 없다.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언제 스페인에 들어왔는지도 모른다. 국경 지나서 좀 지루한 길이 이어진다. 갑자기 한적해 지면서 다들 산넘어 가고 혼자 남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럴 생각이 들 때면 꼭 누군가 나타나서 지친 목소리 but 밝은 얼굴로 "부엔 까미노" 인사를 건네온다.

▲Col de Lepoeder 해발 1,450m 정상이다. 별로 안 높다고? 170m에서 출발했는데? 좌우지간 이제 내려만가면 된다. 안심하고 푹 쉬어도 된다. 신발 양말 벗고 게곡에서 불어오는 훈풍을 즐긴다. 스웨덴친구와 므슈 뱅생도 만난다. 다들 가야할 길을 향해 앉아 있다. 뒤돌아 앉아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여기서 선택해야 한다. 하나는 좁고 꼬불꼬불한 숲길. 하나는 넓고 완만한 길. 당연히 더 길다. 잠시 고민하다가 좁은길을 택한다. 앙드레 지드의 '좁은문'을 생각했다. 물론 소스는 성경이다. 두번이나 언급한다. 그리고 이길은 유럽에서 가장 큰 너도밤나무 숲을 지난다고 한다. 이미 까미노 관련 블로그에서 그 아름다움을 보았다. 충분히 쉬고 뱅생과 얘기 한참 하고 천천히 '좁은길'을 향했다. 근데 이게 완전 패착. 운동부족 상태에서 몇시간을 걸어오르다보니 다리에 힘이 다 빠진 탓에 급경사 내리막이 지옥길이 되었다. 근육경련에다가 발가락은 뒤틀어지고. 내리막에서는 등산화끈을 더 단단히 매어야 한다. 근데 아무리 그래도 다리와 발가락 고통을 견디기 힘들었다. 결국 새끼발가락 전사. 불과 5km 거리를 내려오는데 올라올 때보다 더 땀이 난다. 또 속담을 고쳐야 했다. "오르막이 있으면 끔찍한 내리막이 있다"


▲탈진이 와서 낙엽위에 그냥 쓰러져 누워 하늘을 본다. 저게 너도밤나무인지 뭔지 아무 생각 없었다.

▼근데 잠시후 저 프레임으로 섬바디 나보다 더 지친 얼굴이 쓱 프레임인 한다. 그는 나와 산을 내려오면서 모든 남자들의 공통화제 군대이야기며 마누라 흉보기 등등 즐겁게 수다를 떨며 낙오의 설움을 씼었다. 그는 군대시절 사고로 한쪽 다리뼈를 조금 잘라내서 척추가 휘었다. 그래서 배낭을 바로 멜수도 없었고 첫날 걸으며 엄청 고통을 겪었는데 오르막 보다 내리막이 더 흉악하다는데 깊이 공감하였다. 그는 이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은 아주 완만한 내리막이 틀림없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나와 같이 REI에서 산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우리는 친구가 되었고 같이 미사를 보았는데 그는 아이리쉬 캐톨릭이어서 밀떡을 얻어먹었고 나는 헌금을 했음에도 캐톨릭 신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밀떡을 먹지 못하였다. 정말 배가 고팠었는데 수도원의 저녁식사 시간은 왜 이리 늦은지.


▲Dan(Daniel을 줄여서 이렇게 부른다. 애칭인 셈이다)의 둘째아들 Greg(그레고리)는 거의 아놀드 슈왈츠제네거 수준의 몸매를 자랑했다. 자기 아버지를 충분히 둘러 메고 걸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결혼한지 1년도 채 안되는 새신부 Daisy는 고전적인 한국여자같다. 시아버지 챙기는거며 남편한테 쩔쩔매는 것 등 나쁜 점에서 그렇다는 얘기다. Daisy는 스페인에서 2년간 유학한 적도 있는 하프 히스패닉이어서 스페인어가 능통하다. 얘기할 때 아주 천천히 리듬을 타서 말하고 발음이 정확해서 아주 편했다. 로드러너 제이미는 미사가 끝나고도 잽싸게 사라져 버렸다. 진짜 빠르다.

▼우리는 같이 저녁을 먹고(정말 형편없는 스파게티였다) 늦게 도착한 덕에 새로 지은 알베르게를 배정받지 못해 아주 오래된 수도원 건물로 안내되는 행운을 잡았다. 고맙게도 Daisy가 아래층을 양보해 주었다. 경로우대 받는게 민망했지만 우린 2층침대 싫다. 지하로 내려가면 샤워실과 세탁실이 있다. 유럽 아줌마들은 남들 보는데서도 아낌없이 훌렁훌렁 옷을 벗어대는 통에 기겁하게 된다. 유럽 아가씨들도 그러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몸이 식초가 되었다. 깊게 잠들 것이다. 어쩌면 내일 못일어 날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일 못걸을수도 있다.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자. 



첫날의 특별한 감회가 있었다. 무사히(는 아니지만) 피레네를 넘었다는 안도감 속에 오가는 순례자들이 차츰 동기생처럼 느껴진다. 그렇다 오늘이 입학식인 것이다. 산티아고라는 졸업장을 향해, 같은 방향으로 가는 2012년 가을학기 동기생들은 오늘 하루 캠퍼스에서 수강신청하고 흥분된 마음으로 내일부터의 개강을 준비하는 기분이었다. 실제로 까미노를 걸으면서 오늘 만난 순례자들을 종종 보게 되는데 그러면서 얼굴이 차츰 익어져 정말 동기생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다나까와 스웨덴 뱅생, 한스가 썡장을 같이 출발했는데 론세스바예스에서 다시 다 만날 수 있었다. 다나까는 내일 같이 가자고 청했지만 그와 보조를 맞추기는 힘들 것 같았다. Morgan 식구들과 같이 저녁을 먹게 되면서 자연스레 팀이 되었다. 

론세스바예스 수도원은 2011년 대대적인 레노베이션을 통해 부엌, 세탁실을 갖춘 새로운 알베르게를 제공하는데 내가 묵은 옛시설은 사람들이 넘칠 때만 이용할 수 있다. 도착하면 사무실에 가서 순례자여권에 스탬프 찍고 10유로 내면 침대를 배정해 준다. 이때 저녁예약할건지 물어온다. 레스토랑이 세군데인데 어딘지 잘 찾아가도록 하고 메뉴는 송어(Trout)가 그중 괜찮다. 이곳은 민가도 상점도 아무것도 없고 오로지 수도원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썡장 - 론세스바예스" 구간을 생략하고 이곳에서부터 출발하기도 한다. 


이곳도 썡장의 순례자 사무실처럼 순례자여권을 발급해주는데 여권 주면서 또는 스탬프 찍으면서 질문을 한다. "너 왜 왔지? 종교적인 이유? 영적 수련? 건강 관리?" 대답하고 상관없이 똑 같은 스탬프 찍어준다. 나의 대답은. "모두 다"

이렇게 까미노가 시작되었다. 모든게 그렇듯 시작이 반이다. 여기까지 오기가 힘든 것이다. 수도원의 밤이 깊어가면서 소문으로만 듣던 엄청난 합창이 시작되었다. 남녀혼성 코골이 합창이 원한 맻힌 롤랑의 계곡에 메아리친다.